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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Korea

518민주화운동 그 후 29년.. 5.18 묘지에 가다..

by 슬기! 2009. 5. 20.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이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 포토넷, 광주MBC등이 후원하는
아시아의 봄 사진전에 참가하여 광주의 하루를 촬영한 2009년 5월 16일..

518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이 잠들어있는 국립 5.18묘지를 찾았다..

처음 518민주화운동 그후 29년.. 광주의 하루 라는 컨셉을 듣고는..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을때
나는 광주 무등산이라고 답했었다...

그런데...
광주에 도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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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내리는 옛 전남도청의 모습을 보고는... 5.18 묘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이때만 해도 전남도청에 들어가 보기 전이었으므로..)
그냥 5.18 묘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거 같다...

원래 짜여져 있던 팀들이 있었지만.. 무작정 꼽사리로 들어가서 가게 된 국립 5.18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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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전남도청에서 5.18 묘지로 가는 버스의 노선번호는 518번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만든건지... 광주에서 518 이란 숫자는 정말 커다란 의미가 되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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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5.18묘지 입구에 드디어 도착..
저기 보이는 민주의 문을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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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광장에 들어서자
뉴스.. 신문에서 자주 봐오던 친근한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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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추념문을 지나면 참배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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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5.18민중항쟁추모탑에 도착했다..
추모탑의 높이는 40m로 양쪽으로 세워진 돌기둥 끝에 감싸쥔 손모양안의 타원형상은
새로운 생명의 부활을 상징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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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중항쟁추모탑 앞의 참배단에 향을 피우고 잠시 그분들을 추모한다...

비가 많이 내려서 사람들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그 들을 추모하는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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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중항쟁 추모탑을 지나 보이는 곳이 바로 5.18 신묘지 이다
97년에 새로 만들어진 신묘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5.18민주화운동 열사들이 안장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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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봉사활동 나온 학생이 참배온 학생들에게 묘지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김경철씨가 518민주화운동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고 한다..
1980년 5월18일 딸의 백일을 지낸지 20일여일만에 금남로 제일극장앞에서 계엄군에게 걸렸고
청각장애인이었던 그는 "하나, 둘, 셋" 이라는 구호소리와 함께 장갑차에 오르라는 계엄군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장갑차에 오르지 못하자 2명의 계엄군이 철로 만든 특수살상용 곤봉으로 그를 마구 구타했다고 한다

결국 심하게 다쳐 국군 광주 통합병원으로 이송, 치료를 받으면서 취조를 받았으나
결국 19일 새벽1시 갓 돌난 딸과 아내를 두고 전신타박상으로 숨을 거두었는데 그게 그의 나이 29살이었다고 한다...

29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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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

꽃다운 나이..
활짝 피어보지도 못하고 희생된 수 많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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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려한 휴가의 이준기역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전영진학생...

전영진 학생은 5월20일 책방에 가다가 계엄군에게 폭행당하고 들어와
다시 21일 집을 나왔다가 오후 2시께 옛 광주노동청 앞에서 오른쪽 머리에 총을 맞고 숨졌다고 한다
그의 나의 19살.. 이었다...

29살... 21살.. 19살... 그들이 과연 무슨 죄가 있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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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묘지에 안장된 수많은 분들의 비명을 하나하나 읽어보기 시작했다...
토끼같은 자식과 여우같은 마누라를 두고 세상을 뜬 아버지부터..
19살의 어린 학생까지..  

1980년 5월 18일.. 그 날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들은 지금쯤 손자의 어리광을 보며 흐뭇해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 슬픈건 이렇게 묘지에 비명까지 있는 분들 말고도 아직도 시체를 찾지 못했거나 신원을 밝히지 못해
제대로된 비명도 없는 분들이 있다고 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우리나라... 광주에서 있었다는게 정말 믿겨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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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신묘지를 지나 구묘지로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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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5월 30일 항쟁이후 처음에 만들어졌던 묘지로
계엄군에 의해 희생된 분들이 청소차에 실려와 이곳에 묻혀 망월동묘지라 물렀으며
그 동안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 안장되어 있던 몇몇분은 신묘지로 이장되었으며
이곳은 원형을 재현하여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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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너머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묘지들..
정말 믿기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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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구묘지에서도 역시 봉사활동 하시는 분들이 열심히 설명해주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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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신묘지로 옮겨진 최미애씨..

당시 스물 세살. 가정주부였던 최미애씨는 당시 교사였던 남편이 학생들이 데모를 한다며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자
집앞에 나와 남편을 기다리던 중 계엄군의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임신 8개월의 몸이었으며 총탄에 즉사한 엄마의 뱃속에서 살아있던 아이의 힘찬 발길질이 계속되었으나
엄마의 죽음에 이어... 20분 뒤.. 아이도 숨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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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구묘역 입구에 박혀있는 비석...
심하게 훼손되어 뭐라고 써있는지 잘 알아 볼순 없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전두환 대통력 각하 내외분 민박 마을

이 비석이 여기에 박혀있는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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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3월 전두환이 광주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담양의 한마을에 들어와 민박 기념비를 세웠는데
분노한 광주민주동지회가 그 기념비를 부수어 이곳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수없이 짓밟아져 잘 알아 볼수 없게 되어 버린 비석...
이 비석에 대해 설명하던 한 학생은..

"너무 많이 훼손해 버리면 후세 사람들이 이걸 알아보지 못하니 살짝 밟고만 지나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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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눈물이 되어서 흘러 내리던


2009년 5월 16일 5.18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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